실천신학

하나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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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강의 : 김 세윤 敎授 (總神大 神大院 敎授)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는 미시적인 방법과 거시적인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서유니온에서 사역하고 있는 성경묵상은 성경을 자세히 보는 미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만으로 공부한다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된다. 이런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가끔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보는 기회가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거시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은 상호보완적이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하지만 가끔씩 전문가(신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A. 문제제기

1) 복음서 : 예수님의 가르침

마가는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고 나서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아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마가복음 1: 14 - 15을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公生涯를 하나님 나라 선포로 시작했다. 

막 1 : 15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2) 서신서 : 바울(사도)의 가르침

그런데 서신서중 고린도전서 15 : 1 - 5을 찾아보면은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나와 있다. 특히 3절 후반부에서 5절 전반까지 4개의 小節(영어에서의 that절)로 福音을 說明하고 있는데 이를 要略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復活”, 즉 “ 그리스도의 十字架 ”가 된다.

예수님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점에서 출발하는데 그 문제는 이러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예수의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고전 15장 1- 5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고전 15장 1절에서 3절 중반까지가 서문이고 3절 후반부부터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요약되어 있다. 내가 전한 복음을 꼭 알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그 복음은 바울이 이미 선포했던 복음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서 이미 구원을 얻은 복음이다. 그런데 바울이 걱정이 되었다. 과연 처음 받은 복음위에 견고히 서 있는지 자기가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복음은 자신도 먼저 사도들로부터 받아서 고린도인들에게 전했다. 받고 전했다는 말은 유대 랍비들이 가르침을 선생으로부터 받아서 전승해 주는 전문용어이다. 그 내용은 모두 네 개의 節로 구성되어 있다.



고전 15 : 3 - 5

3절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초대교회부터 랍비들의 가르침의 전형이다. 받은 것 을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핵심)

4절 :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추가설명)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핵심)

5절 이후 (부활증거)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500여 형제, 야고보, 바 울에게 보이심 (추가설명)

그렇다면 1) 죽으심(十字架)의 意味와 2) 부활의 意味는 무엇인가 ?

그 다음에 5절 전반부에 베드로에게 보여졌다는 것 이 네 文章이 우리말 성경에는 절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다가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부활의 眞理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난 씨리즈를 이야기하고 있다.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고, 그 중에 일부는 죽고 태반이나 지금까지 살아 있고, 야고보(주님의 동생)에게 나타나고, 모든 使徒들에게 나타나고 마지막에 滿朔되지 못한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지금 이 부분들은 바울이 다 덧붙이는 것이다. 앞의 네개의 절들의 내용이 복음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절을 보자

고전 15:11 “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그러므로 나(바울)나 저희(다른 사도들)나 다함께 이 복음을 선포하고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이 복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도 이 복음을 믿는다고 한다. 이 복음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과 그가 사흘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이 두 문장 중심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문장들은 앞서가는 문장의 사실을 부가적 기능을 한다. 거기 성경대로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그리스도가 성경대로(according to scripture) 죽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것이 우리 죄를 해결하고 종말에 나타난 메시야 구원자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는데,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은 書信書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를 읽다가 서신서를 읽으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직접적으로는 거의 안 나온다. 나오더라도 가끔 나온다. 그 대신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선포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초두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자기 복음을 십자가의 道라고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자기는 그것만 선포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도들의 메시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까 ? 이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 일부 自由主義 神學者들은 이 차이점에 대하여 예수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 사도들의 메시지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 사도들의 서신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미리 結論부터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사도들의 메시지는 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가에 메시지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통하여(근거)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결과)이 주어진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어떻게 제자(사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는가 ?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가지 전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구약에서의 전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B. 4 가지 전제들

1. 創造思想(主) - 창세기 1:1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하나님만이 主人이시고 王이시다. 본래 히브리어에는 추상명사가 발달되지 않아서 우주(Cosmos)를 지칭하는 말을 그냥 하늘과 땅(天地)이라는 말로 썼다. 천지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지만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시고 땅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이 거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창1:26,27)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육체나 영혼등 어느 일부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니 사람의 외모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신 다스리는 副王(Vice-king)으로 세우신 것이다.

2, 타락 -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으로 땅에서 통치를 대신하게 하신다. 그러나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에 대해 대항하게 하여 인간은 사단의 종이 되고 사단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스스로는 피조물로서 제한성(결핍성)을 지니는데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증상이다. 로마서 6:23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삯’이란 단어는 로마시대 용병들에게 주는 품삵(월급)을 뜻한다. 즉 사단이 우리를 부려먹어 죄를 짓게 하고 그 삯으로 죽음을 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며 타락사상이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나무가 그 생명의 근원인 땅으로부터 뽑힘을 당했다면 그 나무는 죽은 것일까 ? 산 것일까 ? 물론 산 것이다. 왜냐하면 일정한 기간 물이나 양분의 공급이 없더라도 나무안에 비축된 물과 양분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 나무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양분의 계속적인 공급이 없으면 결국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성에서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있다’고 일컫어 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공급이 없어지면 인간은 결국 죽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었다’고 한다. 罪란 바로 하나님의 主人되심을 否認하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다. 人間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의 보호와 모든 능력과 자원을 제공받으며 살도록 지음 받았는데, 오히려 인간은 사탄의 꾀임을 받아서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 바로 罪의 本質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內的인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기能力과 智慧를 개발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맞게 된 결핍이나 고난을 해결해 나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人本主義 운동이다. 그 결과는 해결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대로 풍성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핍이다. 즉 부족함이다. 이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은 무한한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스스로 개발하여 왔다. 그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안된다.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여 科學이나 文明을 발달시켜 왔으나 그 결과는 인간에게 더 큰 죽음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성의 황폐화로 인하여 이웃사이의 관계가 삭막해지고 인심이 각박해졌다. 과학이 발달해서 더 살기 좋은 樂園을 이룬 것 같았지만 반대로 더 많은 어려움과 공해를 불러 일으켜 왔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모습이 이러한 것이다. 11, 12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운동 즉 문예부흥운동은 로마-그리스시대의 찬란했던 문명을 복구하려한 운동인데, 이 운동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대표적인 人本主義 운동이다. 인간은 결핍을 극복해보려고 지혜를 발휘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더 큰 타락을 가져왔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떠난 결과가 무엇인가 ? 그것은 인간성의 황폐와 결핍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탕자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회복과 부요함이 그에게 주어졌다. 아버지께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잔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풍성한 자원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만 부요함(풍요)이 있다는 것이다.

3. 救援 - 세번째로 言約思想이 있다. 언약은 곧 선택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한번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음이다. 언약이란 타락한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원래 王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행복하고 혼자 부요함을 누리면서 잘 살 줄을 알았는데 그 결과는 반대였다. 빈곤함과 결핍이었다.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그 결핍을 보충하려고 투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여 내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결핍은 그러한 방법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언약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다시 너희들의 왕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타락전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 나는 너희의 하나님(王)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 는 이 말이 바로 언약의 핵심문구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친히 너희의 하나님 즉 王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方法이 바로 인간과 언약을 맺는 것이다.

4. 終末思想 - 마지막으로 종말 사상이 구약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하셔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先知者들을 통하여 예고하셨다. 그러므로 그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 다시 한번 올바로 연결되어서 즉 탕자가 죽음의 상태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상속자로 회복이 되어서 아버지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고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나무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이 다시 한번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뿌리박아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어서 사는 삶을 永生이라고 한다. 영생이란 영원한 삶이란 말이 아니고 오는 세상의 삶이란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원한 삶이라고도 하지만 죽음이 완전히 극복된 고난이 없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全知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全能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참여하는 삶이므로 고난이 없고, 결핍이 없는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같이 됨 그것이 긍극적인 의미로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같이 됨이 인간 스스로 내재의 가능성 속에서 찾는 아담에 게 있었던 것같은 인본주의의 그 환상에 인간이 늘 젖어 있다. 인간이 만물의 근원인 것 같고 인간의 내재의 자원, 지혜를 개발하고 하면 인간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가게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속에서 살면 하나님 나라에 살면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어서 하나님 같이 된다. 神的인 삶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종말에 약속된 구원이다. 

C.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바로 舊約에서 약속한 그 구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구약적 전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인간이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구원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것일까 ?

그것이 바로 막 1:15의 내용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임박했다고 했다.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1). 구약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박했음을 우리에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고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는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유대 묵시문학가들같이 땅의 물질적인 유비를 써 가지고 현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말하면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며 구원을 받는 것이며 바로 이런 원칙적인 신학언어를 주로 쓰셨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통치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도 하나님은 마땅히 王으로 主로 군림하셔야 하나, 이 땅에서는 그의 왕권을 찬탈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들에 의해 그의 왕권이 무시되고 그의 “뜻”이 거스려지고 있다. 고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땅위에 사단의 세력을 꺾고 그의 통치를 세워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 그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빌라고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주로 역동적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2) 하나님 나라를 비유(PARABLES)로 가르치셨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는데, 여러 비유 중에서 잔치비유를 즐겨서 가르치셨다. 구원을 큰 잔치로 비유한데서 온 것이다. 잔치 중에서도 특별히 혼인잔치 비유로 가르치셨다(요 2:1 - 11 참조). 잔치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바로 잔치의 상징성 때문이다. 잔치에는 결핍의 상대어인 풍요와 배부름이 있다. 즉 만족함이 있다. 기쁨과 사랑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에 참예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부요함이 있다. 인간의 결핍이 해결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반면에 사탄의 나라의 특징은 罪와 죽음이다. 그래서 사탄의 나라를 죄와 죽음의 나라라고 한다. 사탄의 나라는 결핍성, 욕구불만 슬픔/아픔, 생존경쟁/갈등 투성이다. 부족하기에 서로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면서 살아간다. 생존경쟁에 빠져있다. 제한성에 갇혀 있는 것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제외되어 유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주장하고 또한 이웃에 대하여 자기주장하니까 착취와 경쟁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을 이룬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다른 사람을 내 從으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즉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늑대이다. 자존심의 대결이다. 인간 사회는 욕심의 대결장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 즉 혼인잔치의 비유로 설명하시는데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풍성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는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1)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아울러 2) 상속(기업)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속의 그림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데 특별히 눅 12 : 30에 보면 “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상속) 주기를 기뻐하신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부요함과 상속의 개념이 같이 들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죽음, 고난, 결핍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는 유대 랍비의 묵시문학이나 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D.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점 

1.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임박할 실재의 나라이다.

2. 아울러 하나님 나라는 현재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예수의 강조점이 있다.

눅 11: 14 - 23

눅 11:14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 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눅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눅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눅 11:1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 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눅 11: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눅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 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 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눅 11: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 누느니라

눅 11: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는 것과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예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조롱하였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너희 아들들도) 귀신을 내어쫓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아들들은 (너희자신) 누구를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쫓는냐고 반문하셨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원래 유대인의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적대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능력)으로 즉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1)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기 이미 임했음을 증거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탄의 나라(귀신의 나라)에 속한 자를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셨다. 믿음으로 이동시켰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귀신의 힘을 극복하고 구원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실현된 것이다. 귀신이 쫓겨감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됨을 의미한다. 벌써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로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이적을 동반한 것은 (귀신을 내어쫓고,병자 고치심)하나님 나라의 실현(시위 :Demonstration)이다.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치유’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너무 표면적인 해석만 하여 이 치유를 단지 육신의 병고를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하게 될 때 잘못된 구원론, 성령론과 맞물려서 신앙의 미신화를 초래하게 되며 성령을 마력적인 존재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또 이와 반대해서 구원을 단지 來世의 ‘오는 世上’의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이 관념화 ,추상화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실존의 전 영역에서의 ‘치유’로 이해해야 한다. 고난 가운데 있는자가 하나님 나라의 새생명에 동참한 것이다. 치유의 사역은 죽음의 증상(질병,고난,지혜 없음,우울증,외로움 등)들을 극복하여 온전케 함이다. 감기 걸리면 재채기, 콧물, 목아픔, 熱등의 감기의 증상이 나타나듯이, 죽음도 증상이 있다. 지혜 없음, 가을이 되면 우울함,병,피곤함 이러한 것들은 바로 죽음이 드러나는 증상들이다. 치유는 단순한 병고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치유의 사역이다. 불치의 병인 암을 고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못된 독재자(김정일, 전두환)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 그가 변화되어 새 삶을 살고 바른 정치를 한다면 이 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겠는가 ?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치유의 사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 병 고치는 것과 복음을 전하여 그를 삭개오처럼 변화시키는 일 어떤 일이 더 큰 일인가 ?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사역이 전인적인 온전한 치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 즉 치유하여 온전케 하셨다. 삭개오는 주님을 통해서 치유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또한 이웃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되었다. 뒤틀려진 관계가 바르게 되었다. 육신의 병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이다. 빈곤과 정치적 압박도 고난이다. 구원(치유)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되는 것이다. 모든 참된 것과 선, 아름다움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모든 악, 독, 썩어짐은 사탄으로부터 온다.

안식일

예수님은 그 당시 전례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다.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셔서 더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 “심히 좋은 ”창조를 즐기며 쉰 날이다(창2:1 - 3). 그러나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하여, 그것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고 사단의 주권아래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하지 않고 그의 창조를 고치는 일 ,곧 구원의 사업을 하시는 것이다(요5:17-21).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은 원래의 의미로 안식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극적인 증명이다. 이에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병자를 치유함은 병든 창조를 고쳐 하나님의 “심히 좋은”창조로 종말론적으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대로의 안식일이 있도록 한다는 사실의 상징적 또는 극적인 증명이다. 즉 예수의 안식일에의 치유활동은 사단의 통치아래 병든 하나님의 “좋았던”창조를 사단의 통치 밑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다스림 밑으로 가져와 치유하고 원래의 “좋았던”상태로 회복하여 진정한 ‘안식일’이 있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극적인 천명이었다. 안식일은 결핍에서의 회복과 관계 있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 天地創造를 완성하시고 일곱째날 安息하셨다. 창조를 完成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자기 스스로 일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즉 자기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 나갔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종교라고 만들어낸 것은 모두 지혜와 선행과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는 지혜와 선행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 즉 자력구원을 표방하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자각), 힌두교, 마니교, 플라톤 철학을 비롯한 헬라의 종교(영지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을 통한 구원의 길을 표방하고 있다. 힌두교의 경전인 리그베다에서 베다라는 뜻은 헬라어 ‘οιδα’ (오이다 --- 알다,知)와 같은 의미이다. 타락한 인간은 지혜를 극대화하여서 이것이 교육과 연결되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혜를 개발한 노력이 역사를 살펴보면 계속되어 왔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농업혁명)으로 인하여 소비재를 비롯하여 많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고, 농업혁명으로 풍요한 양식을 가져왔으며, 의학, 통신, 교통이 발달하였다. 이와 아울러 죽음도 더 크게 확대되었다. 통신의 발달로 우리의 삶이 노출되고 있다. 개인의 정보가 노출되고 있다. 교통의 발달은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건축및 토목공학의 발달로 큰 다리를 건설했으나 더 큰 재해를 가져왔다(성수대교 붕괴). 농기계(경운기, 트렉터)의 발달로 인하여 농민들이 기계화되어 편리한 면도 있지만 기계를 잘못 다루면 목숨을 잃거나 더 큰 재난을 당한다. 소비자 사회는 물질주의에 빠졌고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발달은 해결이 아니라 더 큰 죽음을 가져왔다.(성수대교 사건, 택시강도, 지존파 등) 과학발달및 지혜가 개발되면 될수록 죽음은 더욱 더 극대화되고 공해, 인간성 황폐, 억압과 감시가 더 심하다.

이와 반대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회피운동 같은 것이다. 그래도 그 안에 참만족이 없고 결핍이 있다. 죽음이 있다.

안식은 바로 재창조의 축복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일과 관계되어 있다. 안식일은 종말의 때에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이다. 십계명중 제 4 계명은 창조의 완성에 대한 안식의 기념이다. 동시에 종말에 있을 안식일을 고대한다.

안식의 반대인 ‘일을 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 인류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풍요의 상징인 에덴에서 추방 당하자. 자신의 삶을 위해 일해야 했다. 땅을 일구어 나가면서 그들은 문명을 이룩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문명낙관론’이 환영받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형태나 공산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피조물은 피조물의 제한성(결핍성)으로 인해 스스로 삶을 확보할 수 없다. 인간의 ‘일함’을 통해서 인간은 어느 정도 삶을 확보하지만 이 삶은 항상 죽음을 동반한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 한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삶과 자유는 확대되었다. 이와 아울러 죽음의 속박도 확대되었다. 

안식일 지킴 

안식일은 하나님의 하나님(주인,왕)되심을 고백하는 날이다.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생명의 근원이 있고 풍성함이 있음을 고백하는 날이다.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자력구원을 의미한다. 올바른 질서가 아니다. 죽음을 가져온다. 구약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과 행복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의 일을 삼가야 된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치유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결핍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안식일에 손 마른자를 치유하셨는데 손이 말랐다는 것은 결핍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풍요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이러한 고난은 바로 죽음의 증상들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일로부터 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엿새 동안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6일 동안 돈을 받고 의술을 행하였다고 주일에 아무런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업으로서의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울러 주일은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북돋우는 날이 되어야겠다. 교인끼리 만나서 교제하고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지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잔치와 상속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이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는데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한 것을 암시한다.치유를 주로 안식일에 하심으로해서 하나님 나라가 창조를 다시 한번 심히 아름다운 상태로 만들어 우리 모두가 생명의 풍성한 상태로 가게 한다는 것이다.

E.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

예수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더불어 “온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 또 수동형으로 “주어진다”. 인간이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받다”등의 언어를 사용한다. 반면에 “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라는 말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주 독특한 언어이다. 유대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확장하는 내재의 현실이 아니다. 초월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즐겨 쓰는 용어인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거나 ‘확장한다’는 표현은 일체 쓰지 아니한다. 

이러한 예수가 즐겨쓴 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가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1) 초월성과 (2) 은혜성이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초월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초월자가 아니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자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은혜성이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확립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의 영역에 들어와 그 주권의 복(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초월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에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초월성과 은혜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가지 초월성과 은혜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때 자유주의는 문명 낙관론을 주장하였다. 신학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신학으로 정치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천지개벽처럼 갑자기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열심당(열혈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정의와 자유체제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메시야 즉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메시야가 나타나서 다윗의 왕국을 지상에 다시 재건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로마로 부터 자기들을 해방하여 새로운 다윗 왕국을 지상에 재건할 것을 꿈꾸어 왔다. 그들은 혁명으로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예수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은혜성과 초월성이다. 하나님이 초월해 계셔야만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내재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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